책: 르네상스의 여인들

8개월 가까이를 아리랑이란 한 책을 읽다보니, 좀 빠른 템포로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이 당겼다. 하지만 책을 사면 오피스에다가 전시를 해두는 바람에 집에 책이 몇 권 남지 않아 선택권이 별로 없었다. 그 가운데 시오노 나나미의 ‘르네상스의 여인들’이 눈에 띄었다. 사실 이 책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작가 이름만 보고 중고서점에서 사온 책인데 생각보다는 재미있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살았던 이탈리아 여인 네 명이 주인공이다. 각 인물의 연대기를 따로 그려놓은 거라 네 권의 시리즈로 된 책을 읽는 기분이 든다.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이라 서로의 챕터에 까메오처럼 가끔 등장하기도 한다.

작가가 의도했겠지만 캐릭터가 너무나도 다른 네 명의 여자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 주인공 이사벨라 데스테는 약소국의 안주인으로 통치능력도 뛰어나고 권모술수에도 능했다. 남편이 포로로 잡혀가있는 동안에도 꽤나 정치를 잘했고, 외교력도 좋은 것으로 묘사된다.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지만 약소국의 군주인지라 다빈치, 라파엘로 등등에게 무시를 당하는모습도 보인다. 개인적으로 네 명 중 가장 안타까운 인물이다. 시대 또는 환경을 잘못타고나서 제 능력을 다 발하지 못한 것 같다.

두 번째 주인공인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그 유명한 체사레 보르자의 동생이다. 시오노 나나미 책을 보면 체사레 보르자가 엄청 많이 등장한다.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이야기보단 그녀의 오빠 체사레 보르자와 그녀의 아버지 교황의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그 사람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 욕망을 위해 동생이자 딸인 루크레치아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쭉 나온다. 덕분에 체사레 보르자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게 됐다.

세 번째는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완전히 여전사다. 체사레와의 전투에서도 손수 병사들을 지휘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자기 자식들을 볼모로 잡혀가서 살해 협박을 받자 치마를 걷어 아랫도리를 보여주며 ‘자식은 얼마든지 더 생산가능하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 여걸이다. (물론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읽는 내내 바이킹의 라거타 누님 생각이 났다.

마지막은 베네치아의 딸, 카테리나 코르나로. 공화국의 딸로 키프로스 섬의 왕에게 시집을 간다. 하지만 이 결혼 또한 정략결혼인지라 왕은 결혼을 미루고 미루다가, 더이상 미룰 수 없어지자 약혼 4년만에 와이프를 억지로 키프로스로 불러들인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로 이용당했다는 면에서는 두 번째 주인공인 루크레치아와 비슷한 면이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베네치아 편애는 여기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베네치아에 꽂힌걸까.

주인공들의 이야기도 이처럼 흥미롭지만, 사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교황 선출 과정이다. 교황이라 그러면 한 종교계의 수장이니, 교황이 되는 사람은 신심이 깊고 도덕적으로 보통 사람 이상이며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그런 사람이겠거니 싶었다. 책에서 총 4-5명 정도의 교황이 등장하는데 놀랍게도 선출과정이 굉장히 정치적이었다.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을 교황으로 만들려고 엄청 로비를 하고 표 거래도 한다. 그러다가 반대파가 교황직에 등극하여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고. 종교 안에도 세속의 권력다툼이 이처럼 적나라하게 펼쳐질지는 몰랐다. 물론 지금 교황님은 좋은 사람 같아보이지만. 아무튼.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게 어딨겠냐만…

대한화학회

임용이 되고나서 두번째 대한화학회를 다녀왔다. 포스터 발표만 할때는 아무런 마음의 부담이 없었는데, 구두발표 두 개를 하게 되어서 가기 며칠전부터 심적 부담이 컸다. 임용되고 나서 세미나를 여러번 했지만 이번처럼 다수의 잠재적 과제 평가자들 앞에서 하는 발표는 처음이라 긴장이 됐다.

발표 시작멘트

대통령의 말하기 책에서 본 기억에 따르면 처음 몇마디가 그 발표의 성패를 좌우한다. 연설과 세미나는 전달 방식이나 목표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첫 슬라이드에서 청중의 관심을 유도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학회 발표 시작 멘트를 보면 ‘좌장과 조직위에 감사하다’, ‘이런 기회를 줘서 너무 영광이다’ 따위의 것들이다. 이런 감사 인사가 중요하긴 하지만 진부하다고 느껴졌고, 나라는 사람이 기억되도록 하는 것/청중의 관심을 유도하는 것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첫 멘트를 열심히 고민했다.

내가 느끼기에 발표를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생각해봤다. 이 사람들은 도입부에 연구와 상관없는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하여 분위기 환기를 잘 시킨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좌장이 나랑 이름이 같은 형준이 형이라는 것과 이번 대한화학회에서 발표를 두 개 하게 됐다는 것을 이용해서 인사말을 만들었다.

“카이스트 화학과 김형준 A 교수님이 소개해주신 인천대 화학과 김형준 B입니다. “

사실 이게 왜 재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많이 웃었다.

“제가 이번 대한화학회 때 발표를 두 개 하게 됐는데, 특별히 소개해 드릴만한 연구 성과가 많거나 욕심이 많아서 그런건 아니고요. 분과회에서 시키면 뭐든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으로 하게 됐습니다.”

‘시키면 한다’라는 멘트가 너무 조폭같아 보여서 하지 말까 고민했는데 뭐 결론적으론 괜찮았던 것 같다. ‘나도 물리분과의 일원이니까 좀 기억해줘라’는 마음이었다.

“박사 때까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했는데, 포닥을 가서 실험을 하게 됐습니다. 포닥 지도교수님과의 첫 미팅에서 ‘간단한 실험이야. 길어도 6개월? 한번 해볼래?’라고 해서 겁없이 시작한게 3년 반이 걸렸네요. 오늘은 이 간단한 실험 결과를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이 멘트는 여러번 써먹었는데 매번 효과가 좋아서 이제 그냥 외우고 다닌다.

발표 잘 들었다는 칭찬이 많아서 좋았다. 성봉준 교수님이 ‘내일 발표 시작도 꼭 유머로 하라’고 격려해주셨다. 물리분과 나와서 알게된 가장 좋은 분인 것 같다. 아무튼, 둘째 날 발표 시작멘트는 전날 물리분과 식사자리에서 형준이 형이랑 이야기했던 내용으로 했다.

“인천대 화학과 김형준 B입니다. 김형준 A교수님, 그리고 CMU 김형준 교수님을 모셔서 ‘김형준 in P-Chem’ 심포지움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2-3명 더 필요하니 학부생 중에 김형준이란 이름을 가진 친구들이 있으면 물리화학 전공할 수 있도록 특별히 잘 지도해주세요”

이런 멘트들 덕분인지 그낭 발표를 했기 때문인지, 지난번 대한화학회 때보다 훨씬 많은 교수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동기부여

대한화학회를 갈때마다 시간이 아깝다고 느낀적이 많았다. 이번 학회는 배울 것도 많았고 학생들에게서 자극도 많이 받았다. 포스터 세션 발표 목록을 보니 흥미로운 발표들이 꽤 많이 있었다. 특히 연대 김동호 교수님 방 학생들이 엄청 열심히 하는 것을 보니 자극이 많이 되었다. 포스터 퀄리티도 엄청 높고 내용도 굉장히 디테일하고 잘 알고 있었다. 10여명 가까이가 발표하는데 전부 흥미로운 주제였다. 그 중에서 singlet fission을 연구하는 친구도 있었다. 한참 재미있게 연구 이야기를 듣고 서로 자기 소개를 하는데, 내 이름을 듣더니 Zimmerman교수님 방에서 포닥하셨나요라고 물어봐서 놀랐다. 내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부여도 되었다.

교내 기자재비

과사 선생님께서 내가 교내 기자재비 지원을 받게 되었다고 알려주셨다. 그러고보니 과사 선생님들이 내선전화가 아닌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실 때마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시는 것 같다.

신진과제의 최초혁신실험실지원비를 받지 못하여 컴퓨터 세팅이 상당히 어려워보였다. 자비로운 폴형님께서 앞으로 1년 더 미시건 컴퓨터를 쓰게 해주셔서 아주 죽은 목숨은 아니었지만.. 연구도 장비빨을 많이 받다보니 출발선에서부터 뒤처진 느낌이 들어서 좌절감도 많이 들었다. 그런 나에게 교내 기자재비 펀드는 너무 소중한 돈이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결과를 엄청 기다렸는데, 계획보다 한 3주나 늦게 나왔다. 내가 떨어져서 결과를 모르는건지 과제 자체가 무산이 된건지 온갖 걱정이 들었는데 선정이 되서 정말 다행이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 일로 애사심이 많이 올라갔다. 신임 교원들에게 이정도의 연구실 셋업비용을 주는 곳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학교의 발전 가능성이 많이 보여서 기분이 좋았고, 학교가 투자효과를 체감할 수 있도록 논문을 많이 써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된다.

*내가 있는 화학과를 포함하여 물리과, 전산과, 전자과에서 서버를 구매하는데 연구 장비 이름이 전부 제각각이다. 컴퓨터라고 했다간 지원 못받을까봐 ‘나노계산클러스터’, ‘고성능 범용 계산 시스템’, ‘High Performance GPU 탑재 머신’, ‘계산 Station’ 등 컴퓨터인듯 컴퓨터아닌 컴퓨터 같은 이름들을 사용했다. 연구자와 투자자 사이에 상호신뢰성을 회복해서 연구비 집행하는데 좀 더 자유도가 높아졌으면 좋겠다.

짜증

아침에 운동을 하러 오피스텔의 헬스장에 갔다. 주중에 가면 피티 받는 여자 한명과 엄청나게 오랜 시간동안 인터벌로 런닝을 하는 여자가 종종 있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빈 헬스장이었지만 나는 습관대로 이어폰을 끼고 런닝을 하고 시작했다.

한 남자가 들어왔다. 얼마 후 스피커에서 쿵짝쿵짝 노래가 나왔다. 얼마나 크게 틀었는지 이어폰에서 나오는 노래보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가 더 잘 들렸다. 아무리 헬스장에서 노래 틀라고 갖다 놓은 스피커라지만, 누군가 이어폰을 꽂고 운동을 하고 있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한번은 생각해봐야하지 않을까…

내가 먼저와서 이어폰을 꽂고 운동하고 있는데 뒤늦게 와서 노래를 크게 튼다는건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됐다. 만약 나보다 그사람이 먼저 와서 노래 틀고 운동하고 있었다면 별 생각이 들지 않았거나 짜증이 덜 났을 것 같다.

한 마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내가 느끼는 이 불편함, 짜증이 일반적일 거라는 자신이 없어서 엄한 친구들에게 욕설만 배출하고 헬스장을 나와버렸다.

잡담: 학생

아직 랩이라고 부를 만한 공간도 없고 학생도 없어서, 사실 나의 생활은 포닥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구만 하는 생활에서 강의가 추가 되었다는 점과, 후드 대신 정장을 입고 다닌다는 것 말고는…

지난 학기에 졸업연구를 하겠다고 학생 7명이 찾아왔다. 한명은 연구에 큰 관심이 없다고 논문 리뷰를 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하고 나머지 6명+그냥 제발로 찾아온 2학년 1명까지해서 총 7명을 데리고 연구를 시작했다.

학생들이 관심있어 할만 하면서도 쉽게 이해가 되는 주제가 필요했다. 거기다가 내가 한번 해본것이라서 문제가 생기면 바로 해결해 줄수 있어야하고. 그래서 태양전지, 유기촉매 환원전위, 전자전이 메커니즘 세 개의 주제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어제 처음으로 학생이 데이터를 들고 왔다. 사실 내가 계산했으면 진즉에 결과를 봤겠지만, 학생이 스스로 인풋을 만들고 계산을 돌려서 아웃풋을 읽고 결과를 정리해서 들고 오니 결과를 빨리 보지 못한건 기억도 나지 않고 기분이 남달랐다. 얘가 나의 첫 제자가 되는건가, 이제 나는 놀면서 입으로 시키기만 해도 논문 쓸수 있는건가, 얘가 코딩도 금방 배우겠지하는 온갖 망상을 그 짧은 순간에 했다.

사실 학생들이 석사를 진학하는 가장 큰 목적은 취업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전공이 학생들의 취업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걱정이 되어, 대학원 진학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걱정만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되는게 없으니까 일단 저지르고 봐야지. 도움이 되게 해주면 되지…

책: 아리랑

한창 책 수집에 미쳐있을 때 (한달에 10-15권씩 산것 같다) 장편 대하소설을 많이 샀었다. 아리랑도 그 때 산 책들 중 하나이다. 태백산맥을 읽고 느낀점이 많아서, 언젠가 아리랑과 한강도 마저 읽어야지 했는데 그 다짐을 실천하는 데에는 대략 10년이 걸렸다.

일제 강점기를 그려낸 작품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 친일파, 일본인 등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내가 대하소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인물들 간에 얽히고 섥혀있는 삶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들어 남의 일상을 관찰하고 싶은 욕구가 부쩍 커진 것 같다. 이걸 관음증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변태같이 뭘 훔쳐보겠다는 게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에서 남들의 하루는 어떤지 궁금하다. 공부할 땐 어디서 어떤 자세로 하는지, 밥은 뭘 먹는지 등. 아무튼, 아리랑을 읽는 동안 여러 사람의 삶을 살아 볼수 있어서 좋았다.

그 중 몇몇 기억에 남는 인물들이 있다. 독립 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가서 조선에 남은 자식들을 돌봐줄수 없었던 아버지, 철저한 친일로 점철된 삶을 살면서 자식의 미래를 위해 순사자리를 알아봐주는 아버지. 자기가 총각때부터 사랑해온 여자를 끝까지 지켜주는 친일 깡패. 일제에게 속아 하와이로 강제 이민을 가게 된 농부. 양친을 일제에게 잃고 십여년간을 생이별한 남매. 이들이 시간의 흐름속에서 변해가는 모습, 도덕적으로 올바른 방향과 자기 자신의 이익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 등이 특히 흥미로웠다.

내가 일제 시대를 살았으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나는 대단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당연히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위성과는 상관없이 소설을 읽다보니 내가 할 수 있을까란 의구심이 자꾸 들었다. 춥고, 배고프고, 고달프고,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공포를 항상 느끼면서 나라라고 하는 무형의 그 어떤 것을 되찾기 위해 살 수 있을까. 아마 나는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는 못하고, 소극적인 저항 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소시민의 삶을 살지 않았을까…

책의 배경이 되는 군산, 목포, 나주 등을 곧 찾아가 볼 생각이다. 태백산맥을 읽고 나서 가본 벌교가 그렇게 좋았는데, 이번 여행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