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서

학교에 있다보니 추천서를 쓸 일이 종종 생긴다. 유명인이 아니라 그런지 가까운 지인들 혹은 지도 학생, 포닥 때 친구들 정도만 부탁해서 쓸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정성껏 쓰게 된다.

학과장이란 감투를 쓰고 나니 학교 학생들이 외부 장학금을 신청할 때 나에게 추천서를 부탁하는 일이 가끔 있다. 학교 규모가 크지 않고, 내가 전공 필수 과목인 일반화학과 물리화학을 꽤 오랜 기간 강의하여서 인지 대부분의 학생들과 안면이 있고 추천서에 쓸 만한 이벤트가 있어서 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가끔은 누군지 잘 모르는 학생이 와서 써달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초안을 보내달라고 한다. 그 말이 왜 이렇게 입에서 안 떨어지는지. 문득 대학원생 때 셀프 추천서를 썼던 기억이…

오늘 또 하나의 추천서를 작성하였다. 제발 뽑지 마십시오. 6년 전 학교에 와서 이 학생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투고한 논문을 작성하면서 겪은 많은 일들이 쭉 떠오른다.

보다 큰 물에 가서 더 많이 성장하여 우리 학과 최고의 아웃풋이 되길…

잡담: KOCW 강의

학교에서 일하게 되면서 가장 즐거웠던 점 중 하나는 강의를 하게 된 것이다. 교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싶어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강의였다. 대학생 때 보았던 닐스 보어가 강의하는 모습을 보고, 막연하게 나도 저렇게 멋져 보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던 것 같다.

닐스 보어

18년도 첫학기 수업은 굉장한 애정을 가지고 준비하고 또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ppt를 활용한 강의보다는 칠판에 쓰면서 설명하는 강의를 더 선호했고, 어쩌면 시대에 뒤처지는 형태의 강의를 했다. 다행히도 학생들이 좋아해주어 첫 학기에 우수강의상을 받았다. 중간중간 술 사주고 간식 사준게 이유였을지도…

학생들이 찍어준 2018 일반화학2 강의 사진

아무튼, 첫 학기에 강의상을 받고 고무되어 학교에서 추진하는 여러가지 교육 사업에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2021년도에는 처음으로 내 강의를 외부에 공개하였다. INU-micro learning이라는 사업을 통해 KOCW에 강의를 공개하는 사업이었다. 대부분의 대학강의가 50분 혹은 75분으로, 요즘 학생들이 온라인으로 보기엔 너무 길다는 평가가 많았다. 나조차도 10분이 넘어가는 YouTube 영상은 손이 잘 안가니까. 그래서 학교에서는 한 강의에서 하나의 개념만 설명하는 5~10분짜리 영상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사업자체의 아이디어가 재미있어 보여서 새로운 도전을 해보게 되었다. 원래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아이패드 화면에 판서하는 형태의 강의를 하고자 했는데, 학교와 계약서를 쓴 이후에 학교에서 말을 바꾸어서 어쩔 수 없이 일이 조금 커졌다.

촬영 선생님 한 분과 강의자료를 만들어주시는 선생님 한 분, 그리고 나. 총 세 명이서 팀을 만들게 되었다. 다행히 두 선생님들이 정말 잘 도와주셔서 허접한 강의자료와 허접한 나의 강의가 꽤 그럴듯하게 포장 되었다. 아, 그리고 미용실 선생님께서 강의 찍는 날마다 머리도 만져주시고 약간의 화장도 해주셨다. 목과 얼굴색이 다른 이유다

기존에 PPT를 활용하던 수업을 하지 않았는데,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야한다는 특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PPT 자료를 만들어야 되서 조금 힘들었다. 일반화학1 수업을 학교에서 두 세번 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카메라 앞에 서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아 힘들었다. 또한 강의 음질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겨울에 난방기구조차 틀지않고 수업을 하다보니 너무 추웠다.

아무튼, 수업 영상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링크)

두 번째로 외부에 공개된 강의는 일반화학2. 이건 코로나 때 영상 찍은 걸 학교에서 추천해주어 별도의 추가 촬영 없이 외부에 공개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영상으로 남긴 강의 중에서 이 강의가 가장 퀄리티가 높다고 생각한다. 별도의 마이크도 구비하여 음성도 깨끗하게 녹음되어 있고, 필기하는 글씨도 나름 반듯하고, 검은색 칠판에 흰색 분필로 쓰는듯한 느낌도 좋고. 아무튼 가장 애정하는 강의 (링크)

이외에도 물리화학2 (레이먼드 챙), 일반화학2 (맥머리), 고급양자 (자보) 등 강의한 것을 내 YouTube에 올려 놓았다. 앞으로는 중등임용, 편입, 나중에는 수능강의까지 올려서 화학 공부하고자 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 유명해져야지.

연구실

임용되고 거진 10개월만에 연구실 문을 열었다.

처음에 9호관 401호가 연구실로 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봤을 때는 완전 충격이었다. 텅빈 공간에 알 수 없는 플라스틱 가루만 가득했다. 여기서 일을 하다간 폐병이 걸려 죽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고, 이런걸 연구실이랍시고 애들한테 보여줬다간 올려던 애들마저도 도망가겠다는 걱정이 따라왔다. 이걸 언제 연구실로 꾸미나하는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학과 조교 선생님들한테 하소연을 했더니, 학과 조교 선생님들께서 시설팀을 열심히 푸쉬해주셔가지고 생각보다는 빨리 정리가 되었다.

고작 8평짜리 작은 방에 아무것도 없었지만 여기가 내 연구실이라는 생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점심, 저녁먹고 한번씩 가보았다. 노트를 들고 가서 가구 배치를 어떻게 할지 수십번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며칠전 문패를 달았다. 양자화학연구실. 내가 근 10년을 머물었던 카이스트 양자화학연구실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내가 감히 양자화학을 한다고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일단 저지르고 보니 아주 그럴듯해 보인다.

다른 교수님들께서 많이 도와주신 덕분에 빈 방에 책상 6개, 의자 6개, 컴퓨터 7대를 구비했다. (책상/의자와 컴퓨터의 숫자가 맞지 않는 것은 나의 실수였다… 빨리 한 명 더 구해와야지) 보통 wet lab에서 쓰는 120cm짜리 책상을 살까하다가, 그래도 우리는 실험장비랍시고 있는게 컴퓨터랑 책상 뿐인데 이거라도 남들보다는 커야지하는 생각에 160cm짜리를 샀다. 오른쪽 벽면에 4개를 놓고, 왼쪽 벽면에 2개를 놓았다. 가운데에는 회의용 장탁을 사서 랩세미나도 할 생각이다.

프린터는 내 형편이 닿는 선에서 가장 좋은걸 샀다. 예전 양자방에 있을 때도 그렇고 미시건에 있을 때도 그렇고 워낙에 좋은 프린터들을 써가지고 눈이 너무 고급이 되었다. 앞으로 논문은 연구실 프린터로 인쇄해서 보고 싶은데, 애들 눈치가 보일 것 같다.

커피머신을 하나 살까 생각중이다. 왠지 모르게 이론하는 랩이라고 하면 커피향이 날 것 같다는 환상이 있다. 물론 현실은 페인트 냄새가 덜빠진 상태지만…

학생 두 명이랑 랩 정리를 했다. 대학원에 왔으면 하는 두 명이 다 흔쾌히 랩 세팅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책상을 배치하는 일에서부터 선 정리하는 것까지 의욕적으로 하는 것을 보고 ‘아 얘네들도 이 공간을 자기들의 공간이라고 느끼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한명은 그룹 미팅때 쓸거라고 빔 프로젝터까지 구해왔다. 뭐, 이 모든 것이 나의 김칫국일수도 있지만…

오늘 저녁을 먹고 랩에 갔더니 학생 두 명이 피피티를 띄어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빈 의자에 앉아서 학생들이랑 이야기를 하다보니 이제 진짜 교수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교내 기자재비

과사 선생님께서 내가 교내 기자재비 지원을 받게 되었다고 알려주셨다. 그러고보니 과사 선생님들이 내선전화가 아닌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실 때마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시는 것 같다.

신진과제의 최초혁신실험실지원비를 받지 못하여 컴퓨터 세팅이 상당히 어려워보였다. 자비로운 폴형님께서 앞으로 1년 더 미시건 컴퓨터를 쓰게 해주셔서 아주 죽은 목숨은 아니었지만.. 연구도 장비빨을 많이 받다보니 출발선에서부터 뒤처진 느낌이 들어서 좌절감도 많이 들었다. 그런 나에게 교내 기자재비 펀드는 너무 소중한 돈이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결과를 엄청 기다렸는데, 계획보다 한 3주나 늦게 나왔다. 내가 떨어져서 결과를 모르는건지 과제 자체가 무산이 된건지 온갖 걱정이 들었는데 선정이 되서 정말 다행이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 일로 애사심이 많이 올라갔다. 신임 교원들에게 이정도의 연구실 셋업비용을 주는 곳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학교의 발전 가능성이 많이 보여서 기분이 좋았고, 학교가 투자효과를 체감할 수 있도록 논문을 많이 써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된다.

*내가 있는 화학과를 포함하여 물리과, 전산과, 전자과에서 서버를 구매하는데 연구 장비 이름이 전부 제각각이다. 컴퓨터라고 했다간 지원 못받을까봐 ‘나노계산클러스터’, ‘고성능 범용 계산 시스템’, ‘High Performance GPU 탑재 머신’, ‘계산 Station’ 등 컴퓨터인듯 컴퓨터아닌 컴퓨터 같은 이름들을 사용했다. 연구자와 투자자 사이에 상호신뢰성을 회복해서 연구비 집행하는데 좀 더 자유도가 높아졌으면 좋겠다.

잡담: 학생

아직 랩이라고 부를 만한 공간도 없고 학생도 없어서, 사실 나의 생활은 포닥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구만 하는 생활에서 강의가 추가 되었다는 점과, 후드 대신 정장을 입고 다닌다는 것 말고는…

지난 학기에 졸업연구를 하겠다고 학생 7명이 찾아왔다. 한명은 연구에 큰 관심이 없다고 논문 리뷰를 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하고 나머지 6명+그냥 제발로 찾아온 2학년 1명까지해서 총 7명을 데리고 연구를 시작했다.

학생들이 관심있어 할만 하면서도 쉽게 이해가 되는 주제가 필요했다. 거기다가 내가 한번 해본것이라서 문제가 생기면 바로 해결해 줄수 있어야하고. 그래서 태양전지, 유기촉매 환원전위, 전자전이 메커니즘 세 개의 주제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어제 처음으로 학생이 데이터를 들고 왔다. 사실 내가 계산했으면 진즉에 결과를 봤겠지만, 학생이 스스로 인풋을 만들고 계산을 돌려서 아웃풋을 읽고 결과를 정리해서 들고 오니 결과를 빨리 보지 못한건 기억도 나지 않고 기분이 남달랐다. 얘가 나의 첫 제자가 되는건가, 이제 나는 놀면서 입으로 시키기만 해도 논문 쓸수 있는건가, 얘가 코딩도 금방 배우겠지하는 온갖 망상을 그 짧은 순간에 했다.

사실 학생들이 석사를 진학하는 가장 큰 목적은 취업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전공이 학생들의 취업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걱정이 되어, 대학원 진학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걱정만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되는게 없으니까 일단 저지르고 봐야지. 도움이 되게 해주면 되지…

잡담: 종강

며칠전 화학과 일반화학2 마지막 수업을 끝으로, 첫 학기를 마무리했다. 무엇이든 마지막, 끝이라는 말을 붙이면 너무 서글픈 느낌이 든다.

첫 학기 수업으로 화학과, 물리학과 일반화학2를 맡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주말마다 강의노트를 만드느라 어깨가 조금 아프긴 했지만 지금와서 모아놓고 보니 뭔가 뿌듯한 느낌이 든다. 비록 내년에 교과서가 바뀐다는 흉흉한 소문을 듣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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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열심히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판서를 열심히 받아적고있다고 믿고 싶다, 내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수업 마치고 질문하는 학생들을 보니까 대견하기도 하고 뿌듯한 기분도 들고. 아무튼 강의하는 게 생각보다는 재미있었다. 또 과제 채점하다보면 친구 답안지를 베껴서 내는 애들도 있지만, 스스로 풀려고 노력하는 애들이 많아서 더 잘 가르쳐주고 싶다는 다짐도 하게 됐다.

수업은 판서로 진행했다. 파워포인트를 띄어놓고 설명하는 수업은 (적어도 나에게는) 루즈한 면이 있어서… 물론 더 큰 이유는 판서 강의 그 자체의 멋이지만. 하지만 요즘 학생들은 파워포인트 수업에 훨씬 익숙하다. 특히, 책을 요약해서 만든 슬라이드가 공부하기에 편하니까 시험기간에도 그것만 본다고 한다.  내 수업에도 요점 정리한 것을 파워포인트에 올려달라는 중간 강의평가가 있었다. 내가 학교 다닐때만 해도 꼰대멘트 책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개강 때면 도서관 앞에 교과서 사려는 줄이 쭉 늘어서곤 했는데… 아무튼, 너희들이 공부 쉽게 할 수 있도록 내용 요약한거 올려주고 그러진 않을 거니까 책을 구해서 꼭 읽어보길 바란다고 했다. 수업을 듣고 교과서 조차 소화하지 못한다면 사회에 나가서 새로운 지식을 어떻게 습득하고 만들어가겠냐고, 다소 가시 돋힌 소리를 했는데 다행히 저걸로 시비거는 애는 없었다.

학생들의 수준 가늠이 안돼서 비교적 쉽게 냈던 중간고사가 125점 만점에 평균 80점에 육박하는 물시험이 되어, 기말고사는 변별력을 위해 좀 어렵게 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잘 푸는 학생들이 많았다. 비록 평균이 20점 가량 내려가긴 했지만, 아주 시험을 포기한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대 이상으로 잘 해주었다. 작정하고 어렵게 낸 한 문제는 아무도 풀지 못했지만, 125점 만점에 108점이란 고득점을 올린 친구도 있었다. 학생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단 사실에 기쁘면서도, 시험이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대나무숲 강의평가 5점이 깨진 것은 조금 속상하긴 했다. 시험 어렵다는 것이 강의 평가 감점 이유가 된다니…

아직 기말강의 평가는 나오지 않았지만, 중간 강의평가는 5점 만점에 4.8, 4.9를 받았으니 꽤 잘 받은 편이다. 가장 많이 나온 말은 ‘착하다’. 다른 교수님들은 착하단 말 많이 나와서 좋겠다고 했지만, 사실 강의실에서 교수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은 ‘잘 가르친다’일텐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든다. 첫학기라 강의가 매끄럽지 못한 면이 조금 있나보다. 우수강의상이 욕심나긴 하지만, 첫 학기에는 무리가 아닐까 싶다.

기말고사까지 채점을 끝내고 나니 성적 입력 시즌이 되었다. A와 B의 숫자는 학교 교칙으로 정해져있어서 그 숫자 만큼만 줄 수가 있다. 다만 그 안에서 플러스의 비율은 교수의 재량껏 조절이 가능하다. 학점 인플레 방지를 위한 제도이겠지만, 1-2명 정도의 유동성은 주었으면 어떨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점수를 정렬하고 오면,  A0 막차와 B+ 첫머리의 성적 차이가 시험 점수 1,2점 차이로 갈리는 때가 있다. 그런 케이스가 눈에 띄면 문제마다 부분점수를 정말 공평하게 준 것일까하는 질문에 엄청난 스트레스가 몰려온다. 시험 점수 1,2점 차이가 A0와 B+로 갈릴만큼 큰 차이일까…

또 다른 스트레스 요인은 내가 가르친 학생들 모두가 좋은 성적을 받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노력한만큼의 점수를 받아가야한다는 마음이 충돌하는 것이다. 다 자식같은 아이들이라 모두 A를 주고 싶지만, 그건 열심히 한 학생들의 시간과 노력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된다. 나름의 절충안을 만들어 성적 입력을 끝냈지만, 아직도 계속 머리가 아프다.

방학이라 연구할 시간이 많아져서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뭔가 텅빈듯한 허전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