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오랜만에 실험

실험 하나만 하면 논문 마무리인데, 너무 하기가 싫어서 몇 달을 미뤘다. 슬슬 비슷한 컨셉의 논문들이 나오기 시작해서 더는 미룰 수 없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이러다가 스쿱당하고 다른 실험까지 추가로 해야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실험을 시작했다.

일단 실험을 하기 싫은 이유는, 내가 이론쟁이라 실험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실험은 그냥 용액 섞고 달가닥 훅하면 끝인줄 알았는데 직접해보니까 생각해야되는게 한두개가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실수를 하게 되고 다시 해야되는 상황이 자꾸 생기고, 테크닉이 부족하다보니 결과가 잘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런걸 소위 손탄다고 한다. 아무튼, 잘 모르니까 두렵고, 두려우니까 하기 싫어진다.

저 두려움에는 ‘단순히 나는 실험을 잘 모른다’보다 CV실험하면서 생긴 트라우마가 더 크게 작용한다. 이론랩이라 실험기구가 하나도 없어서 실험을 하려면 이 랩 저 랩 돌아다니면서 필요한 것을 얻고, 실험기구 사용법을 물어야한다. CV를 찍기 위해 A 랩에 갔는데, 극도의 불친절과 귀찮아하는 눈빛, “너희 전극은 너희가 사서 써야지?”라고 쏘아붙이는 말투 등으로 엄청난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실험방법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아서 그 간단한 실험을 하는데 6개월 가까이 소모했다는 피로감까지. 정말 한동안은 그 연구실 애들 마주치는 것도 너무 싫었고, 그 랩 근처는 가기도 싫었다. 정확히는 싫다기보단 무서웠다.

다행히 레이저 실험은 co-advisor 랩에서 할 수 있어서, 애들이 친절하게 도와줬다. 애들이 착한 것인지, co-advisor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애들이 실험에 능숙하지 않아서 시간이 오래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CV실험에 비하면 꽤 즐겁게 했다.

마지막 실험은 A 랩에서도, co-advisor 랩에서도 할 수 없는 실험이라 제 3의 랩을 찾아야했다. 그렇게해서 찾은 랩이 Stephenson 그룹. 다행히 우리랩에서 rotation할 때 내가 도와준 학생이 있어서 큰 힘이 됐다. A 랩에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던 많은 테크닉을 배웠다. 내 생애 처음으로 액체질소를 이용한 실험까지 해봤다. 오랜만에 NMR도 찍어보고. 산소/물을 완벽하게 차단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결과는 실패.

그런 실험기구가 어디있을까하고 찾다보니, Sanford group이 나왔다. Nature, Science 공장장, 마귀할멈, 세상에서 영어를 가장 빠르게 말하는 사람 등등의 별명을 가지신 Melanie Sanford 교수님. 랩메이트 Ian의 co-advisor가 Melanie라서 그 랩에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한 명 소개받고 만나기로 했다. 한다리 건너서 아는 사람이긴 하지만 여전히 부담감은 있었다. 이메일 답장이 엄청 느리고 한 두번 씹히기까지 하니까 불안감이 더 커졌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니 순박한 친절한 친구였다. 내가 잘 못할 것 같으면 자기가 해줄수 있다고 하길래, 그럼 니가 해주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참고 내가 한다고 했다. 염치가 있어야지. 사용법도 친절하게 알려주고, 옆에서 계속 도와줘서 너무 고마웠다.

Sanford group의 규모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보통 glove box 한 두개 가져다놓고 실험하는데, 여기는 학생숫자마다 glove box가 있다. 한 벽면 전체를 사용하고 있어서 랩 안에 몇 개의 문이 있는지 셀 수 없을 정도다. 모 주립대에서 NMR 기계 네 대를 사주는 조건으로 스카웃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가 했는데, 연구실을 직접 둘러보니 그정도 미끼가 아니고선 꿈쩍도 안할법한 연구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Paul이 처음 인터뷰할 때 Sanford 그룹과 코웍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는데, 그걸 Stanford로 잘못듣고 거절한 내 귀가 원망스럽다.

아무튼,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마음은 너무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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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교수님 발소리

대학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 교수님께서 랩에 언제 오실지 몰라서 항상 긴장을 했다. 그래서 교수님 방문 앞에 CCTV를 달면 좋겠다, 교수님 목에 방울 달았으면 좋겠다는 등의 개소리를 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내 귀가 진화했다. 교수님 발소리, 방문소리를 기가막히게 구별해 내기 시작했다. 대학원 지도교수님은 워낙 천천히 걸으시고 방문을 좀 세게 닫으시는 경향이 있으셔서 쉽게 구분이 되는가보다했다.

포닥 지도교수님은 그냥 평범한 걸음걸이라 말로는 그 특징을 딱히 묘사할 수가 없다. 거기다가 오피스에 거의 오시지도 않는다. 분기별 이벤트 수준. 그래서 학습할 발소리도, 그 기회도 충분치 않았는데 희안하게 잘 감지한다. 어제도 클래시 로얄하고 있는데 특유의 발소리가 들려서 그대로 화면 덮고 연구하는 척 하고 있었더니 교수님이 나타났다.

지난 10년간 이런 감각만 발달한 것 같다.

잡담: 미국행 비행기 보안검사

며칠전부터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사람은 항공사에서 추가 인터뷰를 해야한다. 항공사 직원들이 체크인하는 줄 앞에서 어디 가는지, 왜 가는지 등등을 물어본다. 직업을 묻길래 화학 연구원이라고 했더니,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했다. 시뮬레이션으로 태양전지를 연구한다고 대충 얼버무렸더니 규정을 만족하는 수준의 대답이 아니었던지, 언제 가장 보람을 느끼냐고 되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 당황했다. “글쎄요, 논문 쓸 때 아닐까요?”라고 대답했더니, 자기도 대학생 때 실험 보고서 쓰는거 너무 힘들었다면서 논문 쓰는건 더 어렵죠? 화이팅하세요라고 했다. 생판 처음보는 사람에게서 응원의 말을 들었더니 왠지 마음이 따뜻해진다.

 

잡담: 지도교수님의 승진

며칠전 지도교수님이 테뉴어 심사 겸 부교수 승진 세미나를 하셨다.

세미나 제목이 Surveying reaction mechanism인만큼 내가 한 일은 발표내용에 포함되지 않았다. 처음 몇 페이지에 photochemistry, electrochemistry 등등도 하고 있다고 간단히 소개된 정도.

자기가 직접 개발한 tool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두 개의 case study를 보여주었다. 놀라운 것은 두개다 자기 혼자서 실험 그룹과 cowork한 결과라는 것이다. Nature와 JACS. 우리랩에서 나온 가장 임팩트 높은 저널이란 점 때문에 저 두개를 선택했을 거라고 이해는 되지만, 그룹멤버가 포함되지 않은 페이퍼를 테뉴어 심사에 쓰다니 왠지 기분이 씁쓸하다. 저 둘 중에 하나라도 나한테 넘겨줬다면…

밥값을 제대로 못 한 건 아닌가 싶어서 괜히 불안하고, 미안하고, 그렇다.

잡담: Check deposit

Check를 현금으로 바꿀려고 은행에 갔다. 도와주시는 분이 앱을 깔면 다음부턴 은행에 직접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한국 은행의 앱을 떠올린 나는, 그냥 니가 도와주는게 나을것 같다고 했다. 아주머니가 정말 간단하니까 한 번 시도해보라고 해가지고 chase 앱을 받았다.

Check 앞면 사진찍고, 뒷면 사진찍으니까 끝. 입금까지 대략 2시간정도 걸렸다.

미국이 왜 선진국인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잡담: 생일

이제는 몇 번째 생일인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1987년에 태어났고 지금이 2017년이니까 태어난 1987년을 제외하면 30번째구나. 이렇게 셈을 해봐야 비로서 알게된다. 예전에는 형들이 나이 대신 OO년 생입니다라고 할 때 왜 굳이 나이 대신 태어난 연도를 말하는 건가 했는데, 이제는 이해가 된다.

초등학교 때 생일파티를 돌이켜보니, 양념통닭와 제도샤프가 생각난다. 그 때는 집에서 어머니가 한 상 가득 차려놓은 생일상을 앞에 두고 친구들이랑 파티를 했었다. 희안하게 많고 많은 음식 중에 빨간 양념통닭이 유독 생각난다. 그리고 선물로는 제도샤프를 가장 많이 받은 것 같다. 금색의 제도4000을 사온 놈도 있고, 평범한 제도3000을 사온 놈도 있고. 연필도 아니고 그 많은 샤프는 다 어디 갔을까…

중학교 때는 세 번 다 피자헛에서 생일파티를 한 것 같다. 학교에서 상당히 멀리 살았던지라, 친구들을 집으로 부를 수가 없어서 외부에서 생일파티를 하게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직원들이 축하해줘서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어린 나이에 주목받는 것이 마냥 좋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부터는 생일에 있었던 일들이 제법 디테일하게 기억난다. 반 애들끼리 돈을 모아서 생일케이크를 사서, 2차 마치고 밤 12시에 테니스장 옆 국기게양대 앞에 모여서 생일파티를 했다. 케이크는 항상 학교 앞 데레사마트에서 사왔는데, 제대로 먹은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생일맞은 애 얼굴에 찍고, 나머지는 쓰레기통으로 갔으니까…

대학교부터는 생일은 더 이상 친구나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여자친구와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여자친구와 보내는 시간에 너무 심취했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같이 파티하는 것 마저 서운하게 느껴졌다. 생일은 일 년에 하나뿐인 나의 날, 나에게 가장 소중한 날이니까 그 날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과만 있고 싶다는 고집이 있었던 것 같다.
내 생일은 아니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친구의 생일이 있다. 기말고사 기간에 생일이 있어서 큰 파티를 못했는데, 내가 대학원에 일찍 가는 바람에 시간이 되서 둘이서 탁주 마시면서 여자이야기를 했던 게 왠지 기억에 오래남는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누군가의 생일은 술을 진탕 마시기 위한 좋은 변명거리였다. 같이 놀던 친구, 형, 누나들이 술을 워낙 좋아해서 다 같이 즐겁게 놀았다. 그때처럼 즐겁게 걱정없이 놀 수 있을까.

미국에 오고나서 첫 번째 생일은 친구와 함께 재밌게 보냈다. 한국 식당에 가서 소주를 마시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즐거웠다.
미국에서 맞는 두 번째 생일 직전에 가족들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비행기값이 가장 싼 날을 고르다보니 얄궂게도 생일 전 날 귀국하게 되었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가족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공허함이 너무 컸다. 2시간 전만해도 가족들이 앉아있던 소파가 비어있고, 잔소리를 하는 사람도 없다. 생일은 나에게 가장 특별하고 제일 행복해져야하는 날인데, 반대로 세상에서 내가 가장 비참하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무작정 옛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러모로 고마운 친구다.
이번 생일은 다행히 동생이 미국에 있어서 같이 저녁식사를 할 것 같다.

이젠 정말 나이가 들었는지, 생일이 예전만큼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잡담: 새학기

새학기 시작일에 맞춰 학부생들이 돌아왔다.

신입생처럼 보이는 애들은 어리버리까면서 부모님들이랑 여기저기 둘러보고, 기숙사 사는 애들은 부모님, 친구들이랑 이삿짐 나르고 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끼리 몰려 다니고.

오랜만에 학교에 활기가 넘친다.

괜히 대학교 입학하고 부모님이랑 동생이랑 이사하던 때가 생각나서 한참동안 구경했다.

잡담: 토끼

같은 랩 포닥이 휴가를 가면서 애완묘 ‘안안’을 10일 가까이 봐주게 됐다.

  1. 안안
    크리스마스 이브날 토끼를 분양받았다고 한다. 중국말로 크리스마스 이브를 평안절이라고 하는데 분양받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 안안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2. 수명
    대략 10년 정도 산다고 한다. 안안이 8살이니까 사람으로 치면 할머니라고 할 수 있다.
  3. 사과
    여러가지 간식을 줘봤는데, 그 중에서 사과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 멀리서 사과향기를 풍겨주면 뒷발로 일어나서 케이지를 물어뜯고 난리다. 사과를 먹으면서 과즙이 발에 묻으면 그걸 없애려고 광적으로 핥는다. 그게 꼭 두손 모으고 인사하는 것 같아서 너무 귀엽다.
    https://youtu.be/SPoVIolb9vA?t=30s
  4. 토끼똥
    구형 고체. 말린 콩 같다.

  5. 물을 조금밖에 마시지 않는다. 200ml 정도 채워놓으면 5일 이상 간다. 물을 저렇게 조금 먹으니까 토끼똥을 싸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발에 물이 묻는걸 엄청 싫어하는 것 같다. 물이 묻으면 광적으로 핥아서 없애려고 한다.
  6. 의사소통
    교감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냥 간식을 주는 내 손만 알아보는 것 같다.

  7. 토끼를 관찰해보면 토끼잠이란 말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낮에도 시도 때도 없이 웅크리고 눈을 감고 자다가, 잠이깨면 눈만 살짝 뜨고 보다가 또 잠드는 것을 반복한다.
  8. 냄새
    동물 특유의 누린내가 약간 난다. 심하진 않지만, 옷에서 그 냄새가 느껴진다.
  9. 울음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시그니처 울음소리는 없지만, 당근을 주면 막 ‘우우우’ 비슷한 소리를 낸다.
  10. 산책
    강아지들처럼 목줄메어서 야외로 산책 나갈 수 없어서 아쉬웠다.

잡담: 친구

나이가 들수록 새 친구를 만드는 것이 힘들어진다.

예전에는 저 사람은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이런식으로 맞춰야 친해질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노력이라도 했는데, 이제는 나랑 안 맞다 생각되면 그냥 내 삶에서 지워버린다.

혼자 지내는 것이 처음에는 외롭고 불편한 부분도 많았지만, 적응이 되고 나니까 오히려 그런 부분들이 장점으로 느껴지는 것도 많다.

 

잡담: 지도교수님과 식사

나랑 같이 일하던 대학원생 하나가 그만두고 나가게 되어서, 지도교수님과 셋이서 식사를 했다. 그동안 이메일을 통해 교수님과 소통해왔던지라 장시간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할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요즘 나의 관심사가 한국정치, 미드, 그리고 아프리카로 너무 한정되어서, 다른 사람들이랑 대화할 때 힘들다. 스포츠, 연예인 가십거리 등 여러가지를 알아야 쉽게 대화거리를 찾을텐데… 차라리 연구 이야기를 하는게 더 편하다고 느껴질 정도니까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간단하게 햄버거나 일식을 먹을 줄 알았는데, 굳이 메인 스트릿까지 가서 이탈리안을 사주셨다. 다행히 같이 간 애가 말이 많아서 맞장구나 처주고 가끔 끼어들면 되어서 생각보단 수월했지만,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는 식사였다. 대학원때는 지도교수님 연세가 많으셔서 대하기가 어려운가보다했는데, 형 같은 지도교수님을 상대로도 이렇게 쩔쩔매는 것을 보면 딱히 나이 때문은 아닌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