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Electronic Coupling

근 2년간 작업한 논문이 오늘 억셉되었다.

메인과제가 실험과의 코웍이라 직접 실험을 해야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컴퓨터가 노는 시간도 덩달아 늘어났다. 나는 일하는데 컴퓨터가 노는 꼴을 보자니 왠지 화가나서 스크립트 한번 짜 놓으면 우려먹을 수 있는 벤치마크 페이퍼나 하나 써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초고는 진짜 쓰레기였다. Mean signed error, mean unsigned error, standard deviation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이런 방법론이 제일 좋다는 것만 제시하는, 분석이나 화학적 통찰은 전혀없는 정말 잘해봐야 JPC A 겨우 갈 수 있는 페이퍼였다. 결과는 꽤 흥미로운것 같은데 왜 이렇게 밖에 못 쓸까 정말 답답했다.

폴 형님이 초고에 양념을 좀 쳤다. 막연하게 overlap integral이 커서 결과가 이렇다고 써 놓은 걸 self-interaction error를 이용해서 수치를 근거로 제시하니까 페이퍼가 꽤 괜찮아보였다. 이정도면 JCTC급은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더 이상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이 딱히 보이진 않았다.

폴 형에게 논문을 보내면 보통은 하루 이틀안에 답장이 오는데 이번엔 거의 일주일이 걸렸다. 논문의 앞뒤를 완전히 뒤집어 엎으라고 했다. 벤치마크 결과가 이러니까 이 방법이 제일 좋고 그 근거는 이렇다가 아니라, 그 방법이 제일 좋을 수밖에 없는 근거를 수식으로 먼저 보여주고 벤치마크 결과가 우리의 수식을 확인해준다는 식으로. 지금 써놓고 보니까 그거 그냥 단락 순서만 바꾸면 되지 않냐고 할 수도 있는데 너무 힘들었다. 이미 내 사고방식이 전자에 맞춰져있다보니 논리전개가 잘 되지 않았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수정본을 다시 폴에게 보냈다.

폴이 manuscript를 2500단어로 줄이고, 그림숫자를 3-4개로 맞추라고 했다. JPC letter에 투고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자질구레한 말들을 다 처내고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만 남겨놓고보니 깔끔해서 좋았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이론에 여러가지 approximations을 사용해서 간단화시킨 정도지만 내가 유도한 수식을 논문에 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뿌듯했다.

수식을 전개해보는 것은 처음이라 유도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논문 형식으로 깔끔하게 쓰는 것은 더 힘들었다. 폴 형이 논문 영어를 잘 쓴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정말 대단하다고 느낀 부분은 내가 준 20줄 가까운 수식을 보기좋게 배열해서 가독성을 엄청나게 높인 점이다. ‘아, 이런 사람이 교수하는구나’하는 존경심이 들면서 ‘나는 아직 멀었구나’ 하는 절망감도 같이 느꼈다.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나는 논문을 write할줄은 알아도, articulate할줄은 모르는구나…’ 내가 교편을 잡는 기회가 온다면 학생들에게 폴형의 논문을 꾸준히 읽힐 생각이다. 분야에 상관없이 영어공부의 목적으로. 물론 나도 같이…

그리고 이 논문을 쓰면서 지도교수님이랑 직접 만나서 대화한적은 10번, 아니 5번도 안되는 것 같다. 거의 모든 의사소통을 이메일로 한 것 같다. 이것은 나에 대한 배려인가…

Letter의 좋은 점 중 하나는 피드백이 엄청나게 빠르다는 거다. 투고하고 2주만에 리뷰가 왔고, 리비전도 1주만에 끝냈다. Submit하고 23일만에 출간. 모든 논문 진행이 이렇게 빠르면 얼마나 좋을까. 빠른 리젝, 빠른 억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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